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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필독 도서

(16회 우수상) 안다운 - [인간의 가치를 묻다]

2020-11-17조회 1006

작성자
문헌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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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饑則附 기즉부하고 飽則颺 포즉양하며 燠則趨 욱즉추하고 寒則棄 한즉기는 人情通患也 인정통환야”. 채근담의 한 구절로, ‘배고프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고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니 이것이 바로 인정의 널리 퍼진 폐단’ 이라는 뜻이다. 20세기 서양의 작가가 쓴 책을 읽고 16세기 동양의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1912년 카프카가 바라본 인간 세계와 1590년 채근담에 드러난 인간 세계가 놀라우리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레고르의 내적 독백으로 전개되고, 그레고르가 죽은 후에는 가족의 모습을 서술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침, 외판원으로 일하던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이후 그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며 무관심으로 대한다. 그레고르는 결국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을 읽으며 세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질문들에 답을 방식으로 책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가족들의 태도가 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벌레로 변하기 전 그레고르는 외판원으로 일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벌레로 변한 후 그는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챙겨주어야 하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가족들은 돈을 벌지 못하는, 즉 자신들이 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그레고르에게 가치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정하고 냉혹하게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그를 내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가족’을 사랑으로 애정으로 형성된 유일한 집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 가족마저도 수단적이고 형식적인 집단으로 변화하였다. 그레고르 가족이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부모님이 누이동생을 쓸모없는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만 냈다고 언급된 부분이 있다. 부모님은 그레고르가 변하기 전까지 여동생을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벌레가 된 오빠를 챙겨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서야 가치를 발견한 듯 보인다. 이를 통해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하기 전에도 가족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낀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고르가 부모님에게서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 역할을 수행한 것에 대한 만족의 표시와 칭찬이 아니었을까? 벌레로 변한 그에게 유일하게 식사를 챙겨주고 안부를 물었던 사람은 여동생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결국 여동생마저도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려야만 해요.”라고 말한다. 나는 이를 여동생이 단순한 연민의 감정과 일부의 아주 작은 책임감만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오빠로 인해 가족들만 갖은 고생을 하며 일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여동생이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벌레가 된 오빠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오빠를 돌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희생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단순한 연민의 감정은 끝이 나게 된다. 오빠가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한 진정한 안타까움과 아픔이 아니었으므로 점점 자기가 희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은근히 바랬을 것이며, 그 대가가 없자 분노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빠를 ‘괴물’이라고 언급하며 오빠의 죽음을 기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여동생의 태도 변화가 누군가의 걱정과 위로 없이 죽어간 그레고르의 비극을 더 강화해주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본다.
두 번째, 현실 사회에 대입해보았을 때 벌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책의 해설에서 ‘벌레’는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인간, 한 집단에서 존재감, 존재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조차 자기 존재를 정립시키는 데 실패한 현대인의 소외된 모습”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존재를 잃어가게 된다는 것은 무섭고 잔인하다. 소속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속을 통한 안정감과, 존재한다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소속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많고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책 속에서 그레고르는 가정에서 존재 의미를 잃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 죽어갔다. 우리는 드라마나 소설, 웹툰 등을 통해 직장에서 해고당한 부모님들이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숨기는 이야기를 흔히 볼 수 있다. 반대로 자식들이 자신이 해고된 것을 부모님께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사연과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에게 소외당하고 가족에게서 존재감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의 이유도 분명 있다. 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역할을 수행해야만 인정받는 이 세상에서, 경제적 수단이 되지못한 스스로를 ‘벌레’와 같다고 생각하며 자책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애정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견디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도 직접 겪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나를 걱정해주던 그 마음을, 위로를 건네던 그 손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 품을 기억해보라. 혹은 내가 나누었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경제적, 수단적 관계에서 애정과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과 처지를 위로받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수단화 현상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이 책을 읽고 난 후 ‘수단적으로 변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제로 토론한 적이 있다. 마땅히 해결방법을 발견하지 못해 다 같이 고민하던 중, 한 친구가 인간관계가 수단적으로 변하고 이에 따라 인간이 수단화되는 현상은 사회가 변하고 발전하면서 마땅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꼭 이러한 현상을 바꿀 필요가 있냐고 물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사회에서 선택되고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수단화는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단화 현상을 허용하는 것은, 인간을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생산 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 사회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수단화는 차별을 옳은 것이라 여기게 만든다. 그레고르 가족을 통해서 본 잔인한 이야기가 이 사회에 만연해지는 것에 아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능력을 판단할 수 없으며 사회가 규정한 틀에 맞지 않는다고 낙오자라고 취급할 수 없다. 칸트는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결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이를 사회 또는 가정에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내적인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주며,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될 기회가 올 때, 다 같이 도와주는 그러한 모습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신만의 짐을 지니고 살아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와 충고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책장을 덮고 나니 톨스토이의 명언이 떠올랐다. 이 명언은 그레고르 가족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었으며, 그레고르 가족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다. 이 책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책을 읽으며 그레고르 가족의 비극을 통해 인간 소외와 수단화 현상에 경각심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폐단을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경제적, 수단적 인간관계로부터 진심어린 애정과 사랑의 인간관계로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배가 고프던 배가 부르던 함께 배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따뜻한 햇살은 가고 매서운 바람이 추위를 가져와도 서로에게 온기를 주는 것이 사회에 널리 퍼진 인정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