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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필독 도서

(16회 장려상) 박주미 - [평범해서 비극적이고 부러운 이야기]

2020-11-17조회 580

작성자
문헌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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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동안 내 책장에 꽂혀있던 ‘보바리 부인’ 덕에 올해 읽은 ‘보바리 부인‘은 썩 내게 그 이름이 익숙했다. 말인즉슨, 나는 전에도 ’보라리 부인‘을 읽은 적이 있고 그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이번 필독 도서 목록이 나온 것을 계기로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는 뜻이다. ’보바리 부인‘이 꽤나 유명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 이름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을 뿐일까? 나는 책을 책장에서 꺼내어 훑기 시작한 시점부터 계속 그것을 되뇌어보았다. 한 번 읽은 책을 내가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이 책이 과평가된 고전이어서인가?
 
다시 책을 끝까지 읽어보았다. 아 - 너무 평범했다. 책의 제목에 나와 있는 ’보바리 부인‘이라는 여자는 놀라울 것 없이 주인공이었고, 놀라울 것 없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 시대 여성의 삶을 살았으며, 놀라울 것 없이 낭만을 꿈 꿨고, 놀라울 것 없이 그 이름 아래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리고 결국 놀라울 것 없이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렸다. 보바리 부인의 삶은 책이 쓰일 당시, 프랑스 길거리를 걷다가 옷깃이 스치는 ’익명1‘ 정도의 삶이었던 것이다. 사실 책의 전체적인 배경도, 또 보바리 부인의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도 요즘 시대에 쏟아져 나오는 엽기적인 드라마와 소설들의 자극적인 내용에 비하면 내 머릿속에 길이 남을 정도의 강렬함은 없었다. 그런데도 조금 커서 읽은 두 번째 ’보바리 부인‘은 잔잔한 여운과 여러 가지 생각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작중 ’보바리‘는 보바리 부인이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이다. 보바리 부인의 이름은 엠마인데, 나는 엠마의 부인으로서의 삶보다는 그녀 자신만의 삶에 더 집중해서 읽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보바리 부인‘이 아닌 ’엠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엠마는 농장 주인의 딸인데, 그래서인지 시골의 삶을 매우 지겨워 하며 화려한 도시의 삶을 계속 꿈꾼다. 엠마의 모습은 지금 당장 내 모습과도 은근히 겹쳐지는 듯했다. 평생을 한국에서만 산 내가 10년이 넘도록 외국에서의 낭만적인 삶을 갈망하는 모습이 엠마와도 꼭 닮았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갈망해보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머릿 속에서 수백번 그려가며 현재의 삶을 지겨워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삶이기도 했다. 교환 학생을 신청해 놓은 채 코로나의 창궐이 잦아들길 바라며 매일을 설렘과 불안으로 보내는 이 맘을, 엠마 정도의 낭만주의자라면 이해해줄듯도 싶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엠마의 그 간절함이, 혹 세간의 말처럼,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엠마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꿈꾸는 것들, ’망상‘하는 것들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헛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의 엠마를 움직이고 생각하게 한다는 데서 비롯되는 중요함과 그 자체로서의 고결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미래에 반드시 있으리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일들을 머릿 속에서 꾸며내고, 그 꾸며낸 환상으로 정신적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생명체는 이 행성에서 인간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엠마의 몽상이 실리적이지 않다고 꾸짖을 것이 아니라, 엠마의 몽상이 아름다운 것, 나아가 인간이라면 할 수 있는 매우 보편적이고도 고결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주위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내가 책에서만 맛본 외국의 생활을 끊임없이 꿈꿀 때,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외국행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일러주었다. 가봤자 다똑같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리고 인종차별을 한 번 맛 봐야 정신을 차린다 등... 다들 나를 한국에 잡아두지 못해 안달이 난걸거야, 라고 어릴적의 나는 살짝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엠마와 나의 공통점은 몽상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환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몸부림쳤다.
 
엠마는 실제로 농가를 벗어 났고, 자신이 꿈꾸던 낭만적인 사랑에 세 번이나 빠져 허우적대 보았으며, 화려한 치장을 하고 화려한 삶을 맛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 움직이며, 선택의 기로에 서서 결국은 자신이 마음 가는데로 행동 했다. 자신이 꿈꿔온 모든 것들을 눈 앞에 펼쳐볼 수 있으리라 마음을 먹고 그것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 몽상을 몽상에 그치지 않도록 한 것은 인간 본연의 습성 아니었을까? 원하는 것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의 습성 말이다. 엠마에게 몰입했던 것은, 나 또한 그러한 자연스런 습성에 끌려 행동했기 때문이다. 엠마가 기숙 학교에서 읽던 책의 영향을 받아 낭만적인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면, 엠마의 순수한 소싯적처럼 나도 나의 순수한 소싯적 때 책을 읽고 외국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막무가내로 ’영어는 글로벌한 언어이다‘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영어만 미친 듯이 공부했다. 아마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외국 생활‘이라는 낭만을 꿈꾸고 있던 나에게는 누군가가 속삭인 한마디가 한줄기의 빛처럼 내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꿈에 그리던 ’외국 생활‘을 하기 위해 교환 학생 신청에 성공한 상태다. 너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십년이 넘도록 머릿속에만 그려왔던 것이 내 눈앞에 펼쳐질 생각을 하니. 엠마도 당연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또, 지금 나의 이 심정처럼, 나쁜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잠깐 엠마에게서 눈길을 돌려 엠마의 남편인 샤를 보바리 씨의 인생에 대해서도 논하고 싶다.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사실은 부인인 엠마에게서 철저히 외면 당했던 남편인 보바리 씨는 내가 보기에도 가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프랑스가 인권 의식이 상당히 선진적이라고 알려진 국가라지만, 책이 쓰일 당시의 가부장적 분위기는 작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본인의 어머니와 엠마의 싸움에서 거진 엠마의 편을 들고 나섰던 것을 보면, 보바리 씨가 엠마를 어느 정도로 사랑했고 또 존중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 외에, 일을 다녀오면 본인 손엔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아내가 대령해주는 실내화를 끌며, 아내가 대령하는 요리를 먹는 것 등의 일은, 지금의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혹자는 아니꼬워할지 모르나,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에 충실하고 아내가 자유로이 그것을 탕진하는 모양새를 보았을 때 지금이나 그때의 잣대를 들이대어 보아도 샤를 보바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오히려 끝에 가서도 가산을 탕진한 것에는 엠마의 기여도가 더 컸으니, 불쌍하다면 차라리 불쌍하다고 평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보바리씨의 인생이 ‘평생 믿었던 아내에게 사실상 배신당했던 비참한 인생’이었다고 평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의문의 시발점은 책을 펼쳐 들고 무심결에 읽어보았던 ‘등장인물 소개’에서였다. 거기서 샤를은 아주 불쌍한 남자로 그려지고 있었다. 왜? 왜 샤를 보바리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것인가? 소설에서 샤를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푼 적은 시작 부분 빼고는 없었지만, 나는 샤를 또한 엠마 못지않게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주체적인 결정을 하면서 인생을 살다 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샤를은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추구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또 어머니의 뜻에 따라 못생기고 늙은 과부와 결혼한 샤를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 놓이자, 샤를 또한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샤를이 내리는 결정은, 사랑의 ‘도피’까지 결심했던 엠마만큼 극단적이지 못했지만, 어쨌든 불행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결정들이었다. 엠마를 보러 농장주의 집에 의도적으로 자주 들렀고, 아내와의 사별 후 결국은 원했던 대로- 역시 엠마와의 결혼을‘몽상’했던 대로- 엠마를 부인으로 얻게 된다. 그 이후 그는 그의 생을 살면서,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참 많았고, 엠마야 어찌 되었든 본인은 본인의 인생에 전반적으로 만족했다. 마을의 마부가 본인의 잘못된 수술로 인해서 다리를 잃었을 때도, 좌절했지만 엠마의 처신 덕에 꽤나 금방 일어설 수 있었다. 엠마로부터 살짝 외면당하는 듯도 했지만 본인만은 그것을 엠마가 죽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엠마의 우울로 인한 낭비벽은 사실 그 시대의 남성이라면 냉정하게 단속하는 것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행복감을 느끼는 대상을 굳이 통제하지 않은 것은 본인의 감정과 생각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 누구도 그 선택을 하라고 목덜미 아래로 칼을 들이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자동(自動)적인 삶이었으며, 그로써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충분히 누린 삶이었다고 평하겠다.
 
다시 엠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엠마는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본인이 사랑에 눈이 멀어 미친 듯이 돈을 내어 쓸 때, 그 낭만은 엠마의 눈을 가리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했다. 낭만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낭만과현실이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교환 학생을 가서 쓰게 되는 거금과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금 알아보고 대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정황만 봐도, 그때나 현재나 인간의 습성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엠마의 상황이 아주 이해가 간다. 그래서 더더욱 비극적이다. 엠마는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그 행복이 결국 엠마의 생을 일찍 마감시켜놓았다. 사람의 생이 자살로 끝났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자살로 끝나는 삶도 여러 질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제까지 스물두해를 살아오면서, 엠마만큼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나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선택을 강요받은 적이 많았고 내 주변 여러 환경들은 내가 특정 선택지만 선택하도록 옥죄어왔다. 물론 엠마와 나와의 성향 차이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엠마만큼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거나 살지 ‘안’았다. 그래서 엠마가 그리 마감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읽는 내내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선택을 할 때 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다 해버리는 삶이 정말 부러웠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네 행동에는 반드시 네가 책임 져라.”
하지만 사회는 개인의 행동에 많은 제약을 두고 있고, 그것을 어긴 대가는, 자신의 손으로가 아닌 타인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고통과 맞먹는다. 그래서 애초에, 내가 책임 질 행동을, 그것이 사회의 잣대로 잘못되었든 아니든 간에, 시도조차 못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짝은 사회의 법규가 희미했던 그 시절에, 자신의 잣대대로 행동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 엠마를 나는 시기하고 동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