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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장려상) 최은주 -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2020-11-17조회 701

작성자
문헌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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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스페인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의 판화집 부제로 붙인 이 명제는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만연한 이권침탈을 외면하거나 이에 무감각해져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경각심을 의미한다. 또한 괴물로 묘사된 모든 종류의 부도덕에 침묵하거나 체념하는 태도는 ‘괴물의 비대화’에 기여할 뿐이므로 합리적 이성의 끊임없는 촉구이기도 하다.
 
1. 개인과 개인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적 차원의 최고 도덕적 이상으로서 ‘이타성’을 제시한다. 이때의 이타성은 개인이 선험적으로 함유하는 본질적 도덕성이 아닌, 경험을 통한 타인에의 온전한 이해로부터 기인한다. 그렇기에 사회 내 존재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이타성은 구조적으로 발현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그리고, 지금은 완화된 형태로 은밀히 존재하는 노예제도와 개인에의 착취를 통해 쉽게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이것이 지니는 본질적 권리에 소유권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개인을 사유화했던 역사는 경제력을 통해 정당화된 개인에의 착취임이 분명하다. 또한 굳이 인격을 물건처럼 ‘사고파는’형태가 아닐지라도 현대에 까지 만연한 각종 차별(인종, 성별 등)은 마찬가지로 개인의 부도덕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하다.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자기보존의 충동이 있고, 이것이 세력 강화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는 특징으로 인해 사회적 개인으로서 도덕성 발현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자기보존 충동이라는 감정을 도덕적 당위라는 이성에 앞세운 결과일 것이다. 아무리 이성적인 인간도 ‘완전히’이성적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고려하여 볼 때, 이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나는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도덕을 당위로 이해하는가, 모든 자율적 행위의 일부로 이해하는가?’도덕은 당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회전체가 보편타당하게 공유한다면, 결코 사회 내 존재하는 모든 개인은 크고 작은 이권다툼을 위해 도덕을 희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을 모든 자율적 행위의 일부로 이해한다면, 도덕은 이기적 개인의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기보다 도덕적 행위가 무엇인지에 치중하는 현실에 살고 있으며, 그마저도 아는 것으로 충분한 사회에 존재하는 듯하다. 이러한 논의에서 나는 우리 사회가 ‘왜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을 지속해야만 했다. 우선, 위법행위로는 이어지지 않는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강제력이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얕게나마 존재하는 강제력은 막강한 지배계급의 정치권력에 희석되어 결국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현실적 타개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는 피지배계급의 의지부족과 소극성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도덕적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은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사회 내 존재하는 다양한 권력요소들은 개인의 도덕성을 저해하기 마련이며, 그러한 연유로 온전히 도덕적인 개인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적 사회 건설을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은 얕거나 짙은 이타성이 아닌, 도덕을 규범적 당위로 인식하고 이를 저해하는 사회적 요소들을 타개하는 실천적 이성임은 자명하다.

2. 개인과 국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개인에의 이권침탈은 보다 체계적이며 강력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니버의 저서는 사회적 차원의 최고 도덕적 이상으로 ‘정의’를 제시한다. 이때의 정의는 평등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사회 내 이미 존재하는 불균형을 억제하고 이로부터 불평등의 재생산을 방지하는 차원의 평등을 정의로 이해한다. 이를 고려하여 보았을 때,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만 정의롭지 못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기회의 평등은 이상의 정의를 구현할 가장 적절한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의 제공은 장애, 경제력 부족, 성별, 학력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인해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상이다.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는 법안이 제정된 바 있으나 그것이 곧바로 완전한 평등의 실현으로 이어진다거나 이를 확실히 보장하는 기제로 작동하지 않기에 한계가 뚜렷하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는 정의롭지만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부는 누진세율에 기반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이렇게 확보한 정부 예산을 경제적 약자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분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에는 절대적으로 빈곤한 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아프리카의 고질적인 물 부족과 관련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정부와 결탁하여 힘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집 앞 수영장에 채워 넣을 물을 매일 사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막상 한 모금 마실 제대로 된 물이 없는 현실이다. 이는 정부의 소득재분배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며, 이것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회적 약자와 그 생명에 대한 본질적 위협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의이자 착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개인에 가하는 보다 직접적인 부정의의 사례는 로힝야 난민사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얀마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은 현재 방글라데시로 탈출하여 거대한 난민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제도화하고, 불교 개종 등을 조건으로 한 시민권법을 제정하여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한 결과, 이들을 ‘무국적 불법 이민자’로 규정한 바 있다. 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탄압을 중단하고자 하는 유엔 안보리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난민촌이 포화 상태가 되어 방글라데시의 정부 지원도 더 이상 이뤄지기 어려워 NGO의 후원에 간간히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코로나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인간안보에의 심각한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국가가 정의라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을 발현하지 못할뿐더러, 이것이 다양한 방면으로 개인의 권리를 훼손, 위협하는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무엇일까? 국가적 부정의의 원인은 결국, 지배계층의 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의 일환으로 이어진다. 해당 논의에서 국가 내지는 정부가 지배계층이라는 계급적 요소와 동일시되는 한계가 있지만, 경제, 정치적 강자로 환원되는 지배계급에 더 많은 이익과 완전한 권력 달성을 위해 사회적 약자가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의의 해결을 위해 지배계층의 갖가지 권력을 빼앗아 오거나 심지어 덜어오겠다는 생각은 현실적 어려움이 따른다. 이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마저도 권력계층을 전부 타개하고 사회구조를 전복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결코 정의에 의한 정의의 회복이라 볼 수 없다. 우리는 정의를 통한 정의의 회복 내지는 발현이 가능한 사회를 마련해야만 한다. 이는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 도덕성을 가장 훼손하지 않는 방안이기 때문이며, 비도덕함으로써 도덕을 회복하고자 하는 행위는 진정한 도덕 사회 실현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의회민주주의적인 접근이다.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통해 피지배계급를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행위를 규탄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평화적 해결이 이뤄져야 한다.
 
3. 국가 간 이권침탈
 
강대국이 약소국의 이권을 침탈하고 강제적인 지배력을 행사해온 사례는 크게 정치적 요소와 경제적 요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지배력 확장을 위한 약소국에 대한 원조 경쟁이 전자에 해당하며, 다국적기업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에 공장을 설치한 사례가 후자에 해당한다. “착취가 아닌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라는 유럽과 미국의 원조 경쟁 내지는 원조 경험은 정말로 개도국 개발과 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견 동의할만하다. 그러나 그 이면이 내포하는 실상은 정치적 영향력을 수월히 행사하기 위함이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이러한 방식으로 개도국 혹은 약소국에 원조를 제공하고 정치적 이권을 약탈하였던 여러 역사적 경험들을 고려하여 볼 때, 이는 오히려 착취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세계화의 흐름이 시작됨에 따라 규모의 경제와 경제적 이익의 최대화를 노리는 다국적 기업이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에 공장을 두고 이들 노동을 착취하는 현상은 현재에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정부적 비도덕성과 타국으로부터의 정부에 대한 비도덕성이 이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다국적기업이 공장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개도국에서 노동자는 다수의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린 아이들의 더욱 값싼 노동력을 다국적 기업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타국으로부터의 정부에 대한 비도덕성이 확인된다. 동시에 교육을 받아야 할 어린 아이와 노동의 강도나 빈도에 적합한 임금을 받아야 할 개도국 국민들이 이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개도국의 불안정한 법체계에도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정부적 비도덕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러한 개도국이 다국적 기업의 설립 허용을 통해 국민들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정의로운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수혜를 입는 것은 정부와 그것을 누리는 지배계급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부터 이상에 언급한 여러 부도덕한 측면들이 비도덕적이며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빈곤, 계속해서 양산되는 난민의 존재, 핵무장과 핵개발, 국제기구의 강대국 위주로 편향된 의사결정 등의 비도덕적인 사회를 목도하고도 이를 호도하는 것은 괴물이 우리 사회로 침범하는 것을 가속화할 뿐이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Sapere Aude!' 과감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라, 두려워 말고 알려고 하라는 칸트의 표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제 끊임없이 알고자 해야 할 때이다. 끊임없이 알고자 하되, 과감히 알아야 하며,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합리적인 지성을 과감히 사용하자고.‘도덕적 개인과 도덕적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본 감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