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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필독 도서

(15회 우수상) 이지현 -[ 이방인]

2019-11-20조회 1270

작성자
문헌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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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실존에 우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생겨나게 된, 거시적으로 보면 인간이 존재하게 된 그 근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이 세상에 난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시작점부터 신의 뜻으로, 혹은 자연의 우연적 선택으로 인해 시공간 속에 던져진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주체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탄생의 순간부터 주체성은 상실된다. 직후에 생겨나는 관계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감각적 자극들. 부모, 의사, 간호사, 병원, 말소리, 약품 냄새, 온갖 관계와 자극들.
우리는 흔히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에 앞선 경험의 과정을 통해 가치관이 형성된다. 형성된 가치관의 단계 이후엔 나름대로 자유의지 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만약 조금만 환경적 조건이 바뀐다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상 우리가 그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것들 범위에 머물러 한정되어있다. 선택권 자체가 주어진 상황 여건 밖을 벗어날 수가 없고,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나를 이루는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손 안에 아이스크림이 있고 그것은 한여름의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것을 견디지 못해 녹아 흘러내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첫 번째, 주어진 상황 자체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있는 한여름 어느 날의 거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그것은 주어진 시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내에 존재하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갑자기 한순간에 집으로 이동하는 등 상황을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두 번째, 이 상황에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거나 혹은 휴지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소매로 닦거나, 그것을 버리는 등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아이스크림이 아까워 버리진 않을 것이며, 아이스크림을 닦자고 옷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므로 대부분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 선택을 할 것이다. 우리는 경험상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하더라도 큰 의미 차이는 없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러한 선택을 했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그 이유를 만든 과거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황적 조건과 경험적 조건을 떠나 인간이 완전히 주체적인 독립적 개체로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뫼르소는 굉장히 오만하고 멍청하여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파악하고 깨달은 양 행동하고, 타인의 감정과 가치를 경시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자신을 시대에 앞서 태어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비운의 실존론자 즈음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여기고, 특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것들을 전부 경시한 채 진심 없이 거짓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마리’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말 이외에 사랑이라 일컫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가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어머니에 대해서조차도 종종 그녀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인간적으로 당연함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냉담하다 못해 소위 말해 ‘인간미 없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에 뫼르소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사랑하는 타인에 대해 애정과 동시에 경멸감을, 또 스스로의―모든 영향력에서 벗어난 하나의 독립적 자아로서―실존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늘 뫼르소와 같은 방식으로 표출되지는 않을 뿐이다. 내적으로 타고난 도덕성 때문이든, 혹은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발현된 산물로서의 도덕성 때문이든 말이다. 그런 우리가 과연 뫼르소를 보고 악마라며, 괴물이라며 당당하게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보편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감각적 자극으로부터 오는 짜증과 분노가 비정상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을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뫼르소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감각적 반응과 행위에 인간 스스로가 자기보존, 확장하여 종의 보존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옳고 그름으로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어쩌면 늘 그토록 모호하고 인위적인 판단 기준과 잣대에 의해 타인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도덕적인 인간성과 동떨어져 그 반대급부에 있는 수많은 욕망들을 표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억제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로써 우리는 이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조화롭게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우리 중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은 이방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어느 부분에서는 스스로가 비정상적이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로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난 견해일까 혹은 그에 부합하는 견해일까 전전긍긍하고, 혹여나 독특한 의견을 가지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진 않을까 불안해한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작용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나의 생각보다는 다수의 생각을 따라가기도 하고,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다수의 그른 선택에 동조하는 것이다. 뫼르소의 내면에 들어가 그의 시선과 사고로 책 속 세상을 조망하다 보면 우리에게 내면화된 도덕성 때문에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마치 내가 진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결코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서사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와 같은 경험을 숱하게 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린 외로운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내적인 도덕심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 공감 능력을 타고나지 못함과 더불어 사회적 통념과 규범, 타자에 대한 존중이 교육을 통해 제대로 학습되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악덕한 의도도 없이 내적으로 결백한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이 모든 통념과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너무나도 실존적인 그의 행위를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따가운 햇빛과 모든 성가신 존재들의 육체적 감각에 매몰되었을 뿐, 일말의 악한 의지도 없이 한 번의 총질과 잠깐의 텀 뒤에 이어 네 번의 총질을 행함이 아니라 그 아랍인의 실존성을 생각해보아야 했고, 레몽이 그의 아내를 폭행할 때 경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대신 그의 아내의 실존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재판장에서 그토록 주체성을 잃어가며 철저하게 대상으로서 평가되어야 했던 이유는, 결코 그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만의 실존을 추구하며 주변의 아픔엔 무관심했던 그가 타인의 실존은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경과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뫼르소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도 무의미하다. 그의 어머니와, 마리와, 살라마노 영감과, 그 외 모든 것들이 없었더라면,―뫼르소 자신도 말했듯―존재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므로 그도 무의미한 것이며 지금의 그를 이룰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관계와 삶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이유를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한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과, 그 외에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시공간과, 또 그것을 메우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 안에서 나 자신만의 독립적 실존을 찾을 수는 없다. 언제나 그 모든 관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자아로서의 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뿐이다.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나‘만’의 실존을 찾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화합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그 안에서의 나의 실존’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샤르트르의 말마따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실이다. 그러나 서두에 말했듯, 실존은 온전히 있는 그대로 실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의 마땅한 본질이 실존에 우선‘해야 한’다.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라는 식상하고 자명하다고까지 여겨지는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간성은 명확히 하나로 콕 집어 규정할 수 없이,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것들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고, 최소한 인간 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종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만 현실적으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태도나 사고방식은 안타깝지만,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종의 존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는, 개인의 실존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자신이 실존함과 마찬가지로 타인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의 실존임을, 그렇기에 자신의 실존이 중요함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실존도 동일한 가치가 있음을 인지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실존이라면, 나의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며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지 말고 타인의 주체성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마땅한 인간성이며, 본질이 실존에 우선해야 하는 이유이다.
 
앞서 보았듯 우리는 뫼르소가 아닐 수도 없고, 뫼르소일 수도 없다. 우리는 뫼르소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지만, 뫼르소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이지만, 그렇기에 노력해야 한다.
인간성이라는 것이 타고나는 것이든 혹은 교육의 산물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추구해야 할 본질이라는 것이다. 삶이란, 나라는 존재가 자기보존을 추구하며 살아가듯 다른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존중하며, 또 나를 둘러싼 그 존재들이 분리할 수 없이 각각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일 테다.
감옥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 행복하게 했던 존재들의 소중함과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깨닫고 삶을 다시 시작해볼 의지를 가지게 된 뫼르소처럼.